사악한 당신
사악한 당신 작품소개
‘잘려야 사는 여자’와 ‘갈궈야 사는 남자’의 상큼하고도 달달한 러브스토리!
기찬은 한 마디 한 마디를 하면서 여린을 무릎에 앉힌 후 그녀의 머리카락 속에 박아두었던 입술을 귓불로, 볼로, 코끝으로 마지막엔 입술로 옮겨가며 마치 도장 찍듯 입맞춤을 했다.
“비밀 하나 말해 줄까?”
“……?”
“나 그날 네 가슴도 만졌다.”
“헉! ……사, 사장님!”
여린이 ‘설마?’ 하는 눈으로 올려다보자 기찬은 뻔뻔하게도 그녀의 양쪽 가슴을 번갈아 지그시 바라보며 사실임을 강조했다.
“잠든 사람한테 그러면 안 되죠!”
“넌 되고? 너도 내 그. 림. 같. 은 입술선 만졌잖아?”
“켁!”
기찬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다 자기도 모르게 손끝으로 그의 입술선을 살짝 만져보았던 여린은 얼굴이 화끈거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뿐이었다면 절대 그런 적 없다고 발뺌이라도 해보았을 텐데,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서 그의 볼에 대고는 ‘난 남자치고 피부도 참 좋아. 그 치?’라고 친히 쐐기를 박아주시니 뭔 말을 더 하겠는가.
“치사하게 왜 자는 척을 하고 그래요? 사장님, 진짜 못 됐어요.”
“하하하하.”
“웃지 마세요.”
“하하하하하…….”
여린의 얼굴이 찌그러들수록 기찬의 웃음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웃음을 잃어버린 남자, 어리바리한 그녀 때문에 요즘 자꾸만 안면근육이 풀어진다.
저자 : 한채연
따분한 것을 싫어하는 전형적인 쌍둥이자리
극소심한 나노A형인데, 주변 사람들은 자꾸만 O형 아니냐고 되물음.
미친 소망 : 펜트하우스에서 살아보기
진짜 소망 : 늘 행복하기
* 출간작 『삼대』, 『사악한 당신』
사악한 당신 본문 중에서
29층에서 엘리베이터가 서자마자 밖으로 뛰어나간 기찬은 1010의 목소리가 들렸던 27층을 향해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달려 내려갔다.
“젠장!”
그새 갔는지 복도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 세 대씩인 여섯 대의 엘리베이터 앞엔 불행히도 여자들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염병할! ……에잇!”
기찬이 엘리베이터 문짝에 발길질을 해대며 짜증을 부리고 있을 때 마침 비서실장 태영이 나타났다. 인사팀장과 뭔가를 얘기하며 걸어오는 걸 보니 이제 막 면접이 끝난 눈치였다.
“면접은?”
“방금 끝났습니다. 오늘 면접에서 10명을 선발한 후…….”
“면접 본 사람들은 다 돌아갔나?”
기찬은 태영의 말을 자르며 다급하게 물었다.
“아니요. 회의실에서 내일 최종 면접을 볼 10명의 발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태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기찬은 회의실 쪽으로 방향을 틀어 뛰어갔다. 얼떨결에 그를 쫓아가며 태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일 있을 최종 면접도 알아서 아무나 뽑으란 식으로 비서 채용에 통 관심이 없던 사장이 돌연 면접에 대해 묻는 것도 그렇고, 면접대기실 쪽으로 바람처럼 달려가는 것도 그렇고 뭔가 요상했다.
‘왜 또 저래?’
태영은 종잡을 수 없는 사장의 뒷모습을 째려보며 부지런히 그를 쫓아 달렸다.
‘벌컥, ……뚜벅 뚜벅 뚜벅.’
대기실에서 옆 사람 혹은 뒷사람과 수다를 떨던 비서 지원자들은 문이 열림과 동시에 걸어 들어오는 두 남자로 인해 모두들 입을 다물고 앞을 응시했다. 한 남자는 면접 때 봤던 비서실장이었고, 그보다 앞서 들어온 남자는 다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앗! 저 백만 싸가지가 왜 여기 있지?’
남자를 보고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숙인 건 맨 뒷줄의 여린뿐이었다. 그런 그녀와 달리 대기실의 다른 여자들은 모두 고개를 반짝 쳐들고서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방금 들어온 남자를 뜯어보기 시작했고, 곧 너나 할 것 없이 탄성을 흘렸다.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는 기찬의 완벽한 외모에 다들 넋이 나간 것이다.
훤칠한 키하며 전체적으로 날씬하면서도 탄탄한 근육질의 몸매. 인상은 약간 날카로웠지만 쌍꺼풀이 지지 않은 지적인 눈매와 기개가 느껴지는 높은 콧대,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입술은 가뜩이나 몽롱해진 여자들을 홀리기에 충분했다.
그런 기찬이 정중앙에 서서 대기실을 훑어보는 순간 여자들은 하나같이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호흡을 멈추었다. 외모도 외모지만, 그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도도하고 차가운 카리스마에 다들 압도돼버린 탓이었다. 여자들은 앞에 서 있는 남자의 정체가 너무도 궁금했다.
“에스시큐어 강기찬 사장님이십니다.”
“와아!”
때마침 태영이 기찬을 소개하자 여자들의 목구멍 속에서만 오르락내리락하던 찬탄이 일제히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머리는 훌렁 벗겨지고 얼굴엔 기름이 번들대는데다 불쑥 튀어나온 배 때문에 구두코가 안 보이는 중년의 남자를 상상했던 여자들은 자신이 모시게 될지도 모르는 사장이 눈앞의 젊은 남자라는 사실에 한껏 흥분했다.
“사장님!”
“쉿!”
고개라도 한번 숙여줄 것이지! 소개를 했는데도 멀뚱멀뚱 서 있는 사장 때문에 민망해진 태영이 슬쩍 보스의 옆구리를 찔렀다. 여자들에게 간단하게나마 인사라도 하라는 뜻이었는데 돌아온 대답은 부라리는 눈과 신경질뿐이었다.
‘나도 모르겠다. 인사를 하든지, 인상을 쓰든지 네 맘대로 하세요!’
태영이 옆으로 물러나자 기찬은 맨 앞줄의 첫 번째 여자부터 차례차례 살펴보기 시작했다. 여자들은 사장에게 최대한 잘 보이기 위해서 저마다 미스코리아 같은 미소를 지었지만, 기찬의 냉랭한 시선은 그녀들에게 단 1초도 머물지 않았다.
그렇게 빠짐없이 여자들을 쭉 훑어본 기찬이 맨 뒤쪽의 누군가를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아니, 사실은 노려보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한참을 그렇게 맨 뒤쪽의 여자를 바라보던 기찬이 그녀를 향해 검지를 쭉 뻗었다.
“비서 뽑았어.”
“예?”
멍하니 기찬의 행동을 바라보던 태영이 홀딱 깬 얼굴로 다가섰다.
“뽑다니요?”
“내 여비서 뽑았다고.”
“누, 누구요?”
“저거!”
그의 손가락과 입이 가리킨 ‘저거’를 향해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한데 모아졌다.
처음엔 자기인 줄 알고 얼굴이 발그레해졌던 197번은 사장의 시선과 손가락이 자기 옆에서 고개를 팍 수그리고 있는 198번 한여린을 향해 있자, 깜짝 놀라서 몇 번이나 사장의 손가락과 198번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 여자일 리가 없는데!’
면접관이 오죽 답답했으면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내젓기까지 했을까! 하긴 198번의 우물쭈물하는 대답에 그녀 역시 여러 번 숨이 꼴딱 넘어갈 뻔했었다. 하필이면 그렇게 답답하고 맹한 여자를 지목하다니, 아무래도 뭔가 잘못된 것 같았다.
“저기, 고개 좀 들고 앞 좀 봐봐요. 네?”
“아우, 안 돼요.”
197번이 옆구리까지 쿡쿡 찔러가며 고개를 들라고 괴롭혔지만 여린은 오히려 가방을 끌어다 얼굴을 더 가리고 끝끝내 버텼다. 백만 싸가지가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부터 내내 이렇게 그녀는 숨을 죽이고 있었다.
“사장이란 사람이 그쪽을 지목했단 말이에요. 혹시 저 사장님 알아요?”
“모, 몰라요. 내가 저, 저런 사람을 어떻게 알겠어요?”
197번은 영 못 믿겠다는 표정이었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여길 어떻게 빠져나가지?’
상황을 살피기 위해 가방 밖으로 슬쩍 고개를 빼본 여린은 자신을 째려보고 있는 백만 싸가지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 순간 그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히죽 웃었다. 기겁한 여린은 잽싸게 가방 안쪽으로 다시 얼굴을 숨겼지만 이미 온몸이 덜덜 떨리면서 다리엔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최종 면접을 보게 될 열 명을 조금 이따 뽑는다면서요?”
“어제 뽑힌 열 명도 있다던데, 지금 장난해요?”
그때 갑자기 회의실 안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사장의 간택을 받고도 고개조차 들지 않는 ‘저거’에 대한 호기심에, 최종 면접 어쩌고 하더니 즉석에서 비서를 뽑아버린 황당함이 보태져 여자들이 웅성대기 시작한 것이다.
‘저 핑크 카디건은 절대 안 되는데.’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태영이 198번의 서류를 찾아 휙휙 넘기며 기찬에게 귓속말로 묻는다.
“사장님! 한여린 씨 말입니까?”
“몰라. 아무튼 저게 내 비서야. 1010, 저거 당장 내 방으로 끌고 와.”
아니, 여자의 이름도 모르면서 어쩌자고 지목을 한 건지 태영은 점점 더 아리송해졌다. 아무래도 사장이 198번의 이름뿐만이 아니라 성격도 잘 모르는 게 분명했다.
“사장님! 이것 좀…….”
기찬은 태영이 내민 면접 점수지를 쓱 쳐다보았다.
‘×’
1010의 지원서 상단엔 X자가 확실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사람 잘 보는 태영이 그녀는 아니라고 제쳐둔 걸 보니 비서 자질이 영 꽝인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잘 된 일이었다. 어디 좀 당해 보라지! 기찬의 얼굴에 보일 듯 말 듯 조소가 어렸다 금방 사라졌다.
“시끄러워! 저거라면 저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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