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출간 당시 유럽을 충격에 빠뜨린 문제작!
‘레 미제라블’ ‘노트르담의 꼽추’의 저자 프랑스 대문호 빅토르 위고의
가장 완성도 높은 숨은 명작 ‘웃는 남자’
영화 《웃는 남자》 원작의 탄탄한 서사를 뛰어난 영상미를 가미해 볼거리를 제공한 영화 〈웃는 남자〉가 개봉되어 원작 못지않은 극찬을 받았다. 원작을 읽으며 상상만 할 수 있는 광대들의 공연장, 빈민가 시장, 무도회장, 웅장한 고성 등을 화려하면서도 그로테스크하게 묘사한 덕분이었다. 무엇보다 입이 찢어져 평생 웃는 남자로 살아야 하는 귀엔플랜이라는 인물이 두려우면서도 가련하게 그려져 강렬한 이미지를 남겼다.
《레 미제라블》《노트르담의 꼽추》 등 뛰어난 걸작을 남긴 프랑스 대문호 빅토르 위고의 숨은 명작, 《웃는 남자》가 더클래식 세계문학 컬렉션으로 출간한다. 1869년에 발표된 《웃는 남자》는 작가 스스로 “이 이상의 위대한 작품을 쓰지 못했다.”고 평가했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다. 충격 실화를 바탕으로 한 줄거리가 기괴하여 출간 당시 전 유럽을 충격에 빠뜨린 작품으로 유명한 《웃는 남자》를 더클래식 세계문학 컬렉션으로 만나 보자.
저자소개
19세기 프랑스 문학의 전 장르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한 프랑스의 대표작가. 1802년 브장송에서 태어나 나폴레옹 휘하에서 장군을 지낸 아버지를 따라 이탈리아, 스페인 등지에서 보내게 된다. 파리로 돌아온 후 처음엔 파리 이공대학(Ecole Polytechnique)에 진학하려 했으나, 이미 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자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는 “샤토브리앙처럼 훌륭한 작가가 되고 싶다. 그렇게 되지 못한다면 작가를 포기하리라”라는 말로써 야심을 토로한다.
1822년 시집 『오드(Les Odes)』를 출간하고, 1826년 역시 시집인 『오드와 발라드(Odes et Ballades)』를 출간하며 시작 활동을 계속한다. 1827년 유명한 『크롬웰 서문(Preface de Cromwell)』을 발표해서 낭만주의 문학 이론을 표방하고, 1830년 희곡 『에르나니(Hernani)』의 상연으로 고전주의 연극과의 문학적 투쟁을 성공적으로 이끌며 낭만주의 문학의 수장으로 등극한다.
이후 1843년까지 장편소설 『파리의 노트르담(Notre- Dame de Paris)』(1831)과 평론, 그리고 기행문을 발표했고, 『동방시집(Les Orientales)』(1829), 『가을 나뭇잎(Les Feuilles d'automne)』(1831), 『황혼의 노래(Les Chants du crepuscule)』(1835), 『내면의 목소리(Les Voix interieures)』(1837), 『빛과 그림자(Les Rayons et les Ombres)』(1840)와 같은 다섯 권의 서정시집을 출간했으며, 『에르나니』(1830), 『뤼 블라스(Ruy Blas)』(1838), 『성주들(Les Burgraves)』(1843) 등 여덟 편의 희곡을 출판한다. 1841년에는 아카데미 회원이 된다.
초기에 위고는 부르봉 왕조를 지지하는 왕당파였지만 1848년 2월 혁명 이후 입법의회 의원에 선출되면서 민주주의자로 변모해서, 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1851년 12월)에 의한 집정에 항거해 국외로 망명한다. 그리고 1870년 제2제정이 무너지고 공화제가 부활된 후에야 귀국하여 이듬해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말년에 살았던 파리의 엘로 거리는 80세 생일을 기념하여 ‘빅토르 위고 거리’로 개칭되었다.
긴 망명 생활은 작품 세계의 전체적 판도를 규정지을 만큼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이 시기에 풍자시집 『징벌 시집(Les Chatiments)』(1853)을 시작으로, 대표적 서정시집인 『관조 시집』(1856)과 서사시집인 『세기의 전설』(1859), 사후에 발간된 미완의 주요 시집들인 『사탄의 종말』, 『신』 등과 더불어, 중요한 소설들인 『레미제라블』(1862), 『바다의 일꾼들』(1866), 『웃는 남자』(1869)를 집필했고, 예술론을 피력한 평론집 『윌리엄 셰익스피어』(1864), 그리고 수많은 미발표 원고들을 남기게 된다.
그는 1885년 5월 22일 향년 83세로 별세했다. 프랑스 정부는 국장으로 예우했으며 “그의 시신은 밤새도록 횃불에 둘러싸여서 개선문에 안치되었고, 파리의 온 시민이 판테온까지 관의 뒤를 따랐다.”(G. 랑송)라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