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수영과 아방가르드 여인
반드시 함께 있어야만 했던 두 사람의 운명적 서사!
그 어떤 영화로도 연출하기 어려운 지독한 사랑, 고통, 그리움
시인 김수영과 그의 아내 김현경이 주고받았던 사랑과 그 서사는 일반 사람들의 통념, 가치관, 윤리의식 등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 심지어 상상력으로도 두 사람의 위험한 선택과 그 언어를 떠올리기 쉽지 않다. 두 사람의 동행에는 늘 삶과 죽음의 경계를 수시로 넘나들었던 시대의 아픔이 따라다녔다. 그들의 첫 만남은 부잣집 딸 16세 문학소녀가 행색이 남루하기 짝이 없는 22살의 시인 나부랭이 지망생을 우연히 만난 1942년 5월이다. 이후 편지를 주고받으며 문학을 교류했지만, 김수영은 소녀에게 있어 그저 시를 잘 쓰는 아저씨일 뿐이었다.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맞이한 해방정국, 이화여대생이 된 소녀는 꿈에서 그리던 ‘백마 탄 왕자’ 같은 청년과 짧은 연애를 하지만 총격사건 스캔들에 휩싸이며 어둠에 갇히고 만다. 이때 김수영은 그 소녀에게 \'문학 하자!\'라고 위로했고, 그 소리는 한줄기 구원의 빛이 되어 두 사람은 마침내 연인이 된다.
무모할 정도의 동거 생활이 잠시 이어졌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만신창이가 된 김현경은 \'이제 다시 이별을 하는구나!\'라며 절망했지만 두 사람은 운명처럼 다시 만났다. 바이런의 시
하지만 두 사람이 겪어야 했던 시대는 혹독했다. 첫 아이 임신 때 전쟁이 터졌고, 김수영은 어느 날 갑자기 의용군으로 끌려갔다. 몇 차례나 죽을 위기에 처하고 매일 토막 난 시체가 나뒹구는 포로수용소 생활을 간신히 이겨내며 기적처럼 생환했지만, 2년 3개월 야만의 시대를 감내했던 김수영의 상처를 보듬어 줄 아내 김현경은 없었다. 다른 남자와 살고 있었던 것이다. 가공할 국가폭력의 트라우마를 감당할 수 없었던 시인 김수영은 밤마다 술에 취해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긴 기다림이 필요했고 그것은 짙은 그리움이었다. 오직 한 사람에게로만 향하던 그들의 시선은 결국 재결합을 만들어냈다. 2년 6개월의 이별 뒤, 두 사람이 만나 다시 부부가 되는 데에는 \'가자!\'라는 김수영의 한 마디가 필요했을 뿐이다.
구수동 시절에 꽃피운 김수영 문학의 정화!
김현경의 사랑과 헌신은 어떤 힘으로 작용했을까?
이 책 [시인 김수영과 아방가르드 여인』에서 저자가 가장 강하게 눈길을 보내는 지점은 구수동 시절이다. 구수동 시절은 시인 김수영을 있게 한 안식처였다. \'창작의 자유는 100퍼센트의 언론자유 없이는 도저히 되지 않는다. 창작에 있어서는 1퍼센트가 결한 언론자유는 언론자유가 없다는 말과 마찬가지다.\'라고 외쳤던 불굴의 시인, 어두운 시대에 앞장선 저항시인의 아이콘으로 성장하게 했던 곳이 바로 구수동이기 때문이다. 늘 새로운 시를 쓰기 위해 몸부림치고 술에 취한 밤이면 야만의 시간에 겪었던 전쟁의 상처를 단말마의 울부짖음으로 토해냈던 시인 김수영의 일상에 그나마 온기가 채워졌던 시기였다.
그는 아내 김현경과 함께 양계를 하면서 난생처음 노동의 땀을 흘렸고 한강이 내려다보는 언덕에서 빨래하고 돌아오는 아내를 기다렸다. 어느덧 광기 어린 주사(酒邪)는 잦아들었고 국가폭력의 트라우마가 조금씩 치유되었다. 그렇게 김수영 문학의 정화가 꽃피우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영원한 아웃사이드’ 시인에게 허락된 그 시간은 많지 않았다. 가혹한 운명 탓이었을까. 그의 대표작 <풀>을 발표한 지 17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아내 김현경은 \'이제 살 만하니 떠났다.\'라며 그때의 상실을 얘기한다.
저자는 이렇게 얘기한다. \'엄청난 국가폭력에 시달리면서도 굴하지 않고 일어나 ‘절대 자유’를 향해 쉼 없이 나아갔던 시인의 삶이 무척이나 궁금했고, 그 힘이 어디서 생겨났는지를 살피고 싶었다. 또한 시인 김수영과 그의 작품에 대한 문학적 평가와 찬사는 넘치도록 많지만, 그의 내밀한 삶에 대한 기록은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되었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 시인의 고단한 삶을 버티게 했던 생명력의 근원을 찾고자 노력했다. 그러면서 열정의 사랑 없이는 위대한 시인이 탄생할 수 없다는 믿음을 드러내며, 그 믿음이 이 책의 출발점이라 말한다, 즉, 재결합 이후 교통사고로 사망하기까지 구수동에서의 13년 동안 온갖 주사를 다 받아주었던 아내 김현경의 헌신과 사랑 없이는 김수영 문학을 얘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해방정국, 전쟁, 4-19로 이어지는 격동의 시대,
생생한 기록으로 전하는 두 집안의 가족사와 그 험난한 여정
김수영과 김현경의 젊은 시절은 현대사 최고의 격동기였다. 일제강점기, 해방정국,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며 시대의 칼날은 두 집안을 예리하게 후비며 큰 상처를 남겼다. 김현경의 아버지는 9-28 서울 수복의 혼란기에 동창생의 고발로 성북서에 끌려가 구타사를 당했고, 나머지 가족도 ‘인민군 부역자’로 낙인찍혀 몰살 위기에 놓여 버선발로 피란을 가야 했다. 부유했던 가산을 모두 잃고 절대 빈곤에 신음하며 고통스러운 피란 생활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김수영의 집안 역시 전쟁의 직격탄을 피하지 못했다. 김수영의 의용군 징집에 이어 셋째와 넷째 동생이 인민군에 끌려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기적적으로 사선을 넘어 생환한 김수영 역시 만신창이가 되어 평생 의치로 살아야 했고 밤마다 전쟁의 공포와 싸워야 했다.
너무나 혹독했던 두 집안의 가족사는 오로지 온몸으로만 견뎌야 했던 현대사의 질곡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생생한 기록이다. 이 책 [시인 김수영과 아방가르드 여인』에는 두 사람은 물론 가족들과 주변 인물들의 눈물겨운 분투와 삶의 애환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났던 뜨거운 가족애와 인간애를 빼곡하게 담았다. 그중에서 8남매를 홀로 키우며 모진 세월과 정면으로 싸웠던 김수영의 어머니(김현경의 시어머니)의 헌신과 관용은 뭉클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저자가 서문에서 지적한 것처럼 김수영 작품에 대한 문학적 평가와 찬사는 넘치도록 많지만, 그의 내밀한 삶에 대한 기록은 빈약한 게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두 사람(시인 김수영과 아내 김현경)의 파란만장한 삶의 내면을 살핌으로써 김수영 시 세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 소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그 어떤 여성에게서도 찾을 수 없는 독특한 캐릭터의 아방가르드한 여인, 1세기 종주 직전에 있는 김현경의 거침 없는 대서사와 뒷이야기를 살피는 것은 이 책을 읽는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가 될 것이다. 더불어 평생 김현경에게 집착했던 대학교수 이종구와 얽힌 이야기를 비롯해 그 시대를 풍미했던 임화, 정지용, 고은, 박인환, 조병화, 김순남, 설정식, 고은, 백낙청, 모윤숙 등의 당대 문인들의 옛이야기는 이 책을 읽은 색다른 즐거움이 될 것이다.
번호 | 별점 | 한줄평 | 작성자 | 작성일 | 추천수 |
---|---|---|---|---|---|
등록된 한줄평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