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코의 거짓말
\'무너지기 위해 치솟는
단 한 번의 신이 되는 것\'
부서지고 망쳐진 세계 속에서도
작고 연약한 것들을 끌어안는 시
<타이피스트 시인선>002번으로 박은정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아사코의 거짓말』이 출간되었다. 박은정 시인은 2011년 [시인세계』로 등단하여 시집 [아무도 모르게 어른이 되어』(문학동네, 2015) [밤과 꿈의 뉘앙스』(민음사, 2020)를 출간하며 자신만의 목소리와 리듬으로 시적 세계를 구축해 왔다. 사랑과 죽음을 함께 쥐는 강한 악력과 슬픔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문장으로 주목 받은 시인은 시집 [아사코의 거짓말』에 이르러 일상을 파고드는 낯선 감각과 예리한 시선으로 사랑과 세계의 비루함에 대해 말하기 주저하지 않는다. 부서지고 망쳐진 세계 속에서도 상처투성이의 빛을 말하고 야만적인 사랑 앞에서도 정면을 직시하며 ‘작고 연약한 것들’의 마음을 끌어안는다. 주저하고 의심하더라도 모든 가능성을 믿는 마음으로, 시인의 문장은 \'무너지기 위해 치솟는 단 한 번의 신\'이 된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
점성과 농도로만 이루어져 있을 때
세계에 가닿을 손끝을 예감했던 것처럼
손목과 발목이 서로 엉킨 채로
두려움이, 또 두려움 없는 마음이* 동시에
서로를 한 몸처럼 먹고 마시며
어떤 사랑은 사랑이 되기 위해
자신이 아끼던 마음을 죽이기도 하니까-「작은 경이]중에서
섣불리 구원이나 사랑을 말하는 대신
거대한 빙하, 깊은 잠과 얼음과 황무지 사이에서
시인은 \'점성과 농도로만 이루어져 있\'던 생명의 시작부터 \'안간힘으로 마지막 건반을 누르는\' 늙은 연주자의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삶에 근본적인 질문과 의심을 놓지 않는다, 또한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거짓이 되는 현실 앞에서 두려움과 두려움 없는 마음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인간적 감정에 주목한다. 그 상반된 마음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아끼던 마음\'까지 부인하게 되는 상황을 역설적으로 바라본다. 시인은 사랑에 실패한 이들에게 섣불리 구원이나 사랑을 말하는 대신 \'보고 들은 것을 내내 만지고 또 만져 새로운 문장을 공중 위로 펼쳐 놓는다\'.(백은선, 추천사) 그 문장을 부려놓는 곳은 일상에서 벗어난 빛과 어둠 사이에 걸린 바다이며 거대한 빙하이자 깊은 잠과 얼음과 황무지 사이이다. 더 이상 달아날 곳 없는 곳에서 시인은 주저하고 의심하더라도 다시 걸음을 내딛는다.
-이건 먹을 수 있는 거야?
-나도 처음 보는 열매인데--
-그럼 내가 먹어 보고 말해 줄게
-목숨을 걸고 싶을 만큼 먹고 싶은 건가?
-우연에 목숨을 맡기는 거지. 독이 든 열매면 다행이고, 독이 든 열매가 아니라면 목숨이 하나 더 생기는 거야.
누가 이런 꿈을 시작했는지 알 수 없다
수학 공식처럼 딱 떨어지지만
매번 틀리고 마는 문제처럼-「유칼립투스가 그려진 침대]중에서
기적이라는 건 만년설이 쌓인 미래 같은 것. 그 속에 맥락 없이 존재하는 벼랑은 신의 장난질이지. 무언가 빠르게 사라지는 기분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손끝에서 분명한 통증이 인다. 애인은 갈증이 나는지 침 마른 소리로 중얼거린다. 그 소리는 허공을 지우는 담배 연기처럼 아스라이 멀어진다. 이제 아사코는 물 잔을 건네며 말한다. 일어나. 반세기가 지났어. 애인의 따듯한 손이 아사코의 손을 잡는다. -「아사코의 거짓말]중에서
목숨을 걸고 달아나는 존재의 사랑으로부터
불완전한 운명 안에서 자신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그 안에서 \'목숨을 걸고\' 처음 보는 열매를 먹거나 바다 소리가 들이는 쪽으로 달아나는 존재의 행위에 시인은 집중한다. 사랑으로부터, 스러져 가는 세계로부터 달아나려 할수록 우리는 결국 제자리를 돌며 자신의 고독과 마주할 수밖에 없는 작은 존재들이므로, 시인은 그 상처들을 공유하고 받아들이며 \'온갖 어지러운 풍경들 사이에서 떨고 있는 ‘우리’들을 불러 세운다\'.(김연덕, 추천사) 시인은 \'넘어지고 쫓겨나면서도 뒤를 돌아보는 다정함\'으로 빛을 말하고 그치지 않는 눈보라 사이를 걷는다. 시인은 상처 입은 온몸으로 신이 버린 \'작은 경이\'를 끝나지 않을 음악처럼 펼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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