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동인문학상 · 이상문학상 수상작가 최윤의 중편소설
“숲은 깊고 푸른 것이 아니라 음험하고 위태로웠다.”
우연히 파고드는 일상의 폭력과 무관하게 스며드는 과거의 속력
한국 현대소설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중편소설의 의미와 가치를 되살려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단편의 미학과 장편의 스토리텔링을 다시 선보이고자 소설향 시리즈 중에서 5편을 골라 특별판으로 출간하였다. [소설향 특별판]으로 출간된『숲속의 빈터』는 동인문학상과 이상문학상 수상작가인 최윤의 중편소설이다.
이 작품은 일상생활에서 마주치게 되는 폭력이 얼마나 불온하고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지를 통해, 이데올로기 시대를 마무리하고 맞는 일상이 숨겨진 과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묵시록적인 메시지를 전한다. 동거하기로 약속한, 서른 갓 넘은 여자와 남자는 일상의 피로를 씻어낼 ‘목욕탕’을 갈망하며 전나무 숲이 있는 시골에 집을 얻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 앞에 한 늙은 남자가 나타나 집 건너편 숲속의 빈터에서 환한 대낮에 나체로 자위행위를 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 일로 그들은 목욕탕을 꾸리는 일을 미루게 되고, 늙은 남자에 얽힌 엄청난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된다.
작가 최윤은 아무렇지 않은 듯한 문투로 일상 안에 작은 사건 하나를 불순물처럼 삽입시키면서, 서사의 일상성에 모종의 불길함을 제공한다. 특별한 기교나 희귀한 실험을 거치지 않고도 여러 갈래의 의미와 울림을 복병처럼 숨기는 그의 솜씨는, 소설이라는 이야기가 ‘사건’에서 ‘서사’로 이르는 얼개의 구체화 과정임을 깨닫게 한다. 그것은 일상의 폭력이 인간의 심리에 파고드는, 과거의 속력이 사연의 물리에 스며드는 적나라한 과정이다. 전원을 꿈꾸는 두 남녀의 생활에 갑작스레 찾아온 낯설고 불편한 타인의 존재는 삶의 이면에 숨은 비극이 얼마나 강력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깊고 푸른 것이 아니라 음험하고 위태로운 숲”에서 사랑과 미래를 약속하는 두 젊은 연인의 일상이 어떻게 붕괴되는지, 그 힘이 얼마나 파괴적인지 독특하고 역설적인 서술을 통해 한국 소설이 담을 수 있는 시대의 민낯을 낯설고 우아하게 보여준다.
저자소개
아름다운 문체로 사회와 역사, 이데올로기 등 이성적이고 관념적인 주제를 다룬 소설을 쓰는 소설가 겸 번역가. 서울에서 출생하였고, 본명은 최현무이다. 1966년 경기여중과 1969년 경기여고를 거쳐 1972년 서강대학교 국문학과에 입학하여 교지 편집을 했으며, 1976년 서강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에 입학하였다. 1978년 첫 평론 「소설의 의미구조분석」을 『문학사상』에 발표하고, 이후 5년간 프랑스 엑상 프로방스의 프로방스대학교에서 프랑스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에 관한 연구로 문학박사학위를 받고, 1983년 귀국하여 서강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교수가 되었다. 1988년 광주민주화운동의 비극을 다룬 중편소설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를 『문학과 사회』에 발표하면서 소설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의 소설은 언제나 사회와 역사, 이데올로기 등 이성적이고 관념적인 주제를 다룬다. 『벙어리 창(唱)』(1989) 『아버지 감시』(1990) 『속삭임, 속삭임』(1993) 등은 이데올로기의 화해를,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1988) 『회색 눈사람』(1992)은 시대적 아픔을, 『한여름 낮의 꿈』(1989) 『너는 더 이상 너가 아니다』(1991) 『푸른 기차』(1994) 『하나코는 없다』(1994) 등은 관념적인 삶의 의미를 다룬 작품으로서 그의 소설은 다분히 관념과 지성으로 절제되어 남성적인 무게를 지닌 작가로 평가된다.
그의 소설은 언어에 대한 탐구이면서 현실에 대한 질문이고, 그 질문의 방식을 또다른 방식으로 질문하는 방식이다. 그는 우리를 향해 여러 겹의 책읽기를 즐기라고 권유한다. 그의 소설은 이야기의 시간적 순서를 따라가는 독서가 아니라 그 이야기의 작은 부분들을 여러 층으로 쪼개서 그 이야기 전체의 의미를 독자 스스로가 완성하기를 기대한다. 그의 소설들을 즐기는 방법은 하나의 이야기를 이루는 사건의 선후관계를 의식 속에서 따라가는 것보다는 그 소설의 단락과 단락, 문장과 문장들 사이에 박혀서 보석처럼 빛나는 실존에 대한 통찰을 음미하는 것이다.
그의 소설에서 화자는 그 이야기 속의 상황과 운명을 이끌어가는 영웅적 능동성을 지니기보다는, 그 소설을 독자들에게 읽어주는 관찰자적 화자의 역할을 맡고 있다. 바로 그 화자 자신의 고통과 상처를 이야기할 때도 그 어조는 섬뜩하리만큼 냉정하다. 그 같은 냉정함은 현란하면서도 절제되어 있는 최윤 특유의 수사학에 포장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고통 속에서 길어올려진 미학의 위엄을 보여준다.
한편 최윤이 전통적 기법의 틀을 벗어나 다채로운 소설 문법을 시도하는 작가이면서도 유종호, 이어령 등의 대가급 평론가들로부터 이상적 단편소설의 전범으로 불리는 작품을 내놓은 것은 그의 소설론이 전통과 실험의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문학교수와 문학비평가로도 활동하며, 이청준의 소설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해외에 소개하는 등 번역가로도 활약하고 있다. 1992년 『회색 눈사람』으로 제23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하였고, 1994년 『하나코는 없다』로 제18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저서에 작품집 『너는 더 이상 너가 아니다』(1991)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1992) 『속삭임, 속삭임』(1994) 『겨울, 아틀란티스』(1996) 등이 있고, 산문집 『수줍은 아웃사이더의 고백』(1994)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