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상학의 땅위에서
써가기로 결심하고 한 십여 년 시를 써 왔다. 그러나 왠지 근래에는 그것을 써가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 시점에서 그동안 써온 것들을 정리해보고 금후 시와 나와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바로 그러한 정리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이제 시는 나에게 완전 무용한 것이라는 생각이 더 짙어지기 전에 그간 쓴 것들을 우선 활자화 해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하나 다 애착이 갈 정도로 충분히 다듬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더 짙게 더 빨리 먹구름처럼 역습해 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이 정도에서 가까스로 자만해 보기로 했다.
시를 쓰기로 결심하고 사물들 속으로 아니 내 속으로 들어가 봤다. 그러니까, 그것들 자체가 내 존재 자체가 다름 아닌 바로 시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비롭게 들 서 있는 미루나무, 향나무, 목련이라든가, 언제부터 있었는지 나로서는 결코 알 수 없는 길모퉁이에 서 있는 차돌이라든가, 둘이 이야기를 나누며 지나가는 학생들이라든가, 이런 것들이 다 그러려니와 내 자신 역시도 한 수의 손색없는 시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침에 나갔다가 밤에 돌아와 가만히 누워, 나는 그 날 내가 쓴 시를 읽어본다. 등불에 표면이 비치는 검은 바다를 내려다보며, 몸으로 그 날 쓴 내 시를 읽어보는 것이다.
이렇게 몸으로 썼는데, 구태여 꼭 글로 쓸 필요가 있을까? 요즘은 누우면 자꾸 이런 생각들이 든다. 누구의 말처럼 바로 이 형이상학의 땅위에 서 있는데, 무슨 또 형이상학의 세계가 필요한가?
시란 현실을 형이상학의 세계로 지각케 만드는 자극제와 같은 것인가? 그렇다면 현실을 그렇게 지각하고 있는 한, 시는 무용한 것이 아닌가? 무조건 시를 써대는 대신, 앞으로 얼마간 이 문제를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려고 한다.
사실상 그동안 우리는 보이지 않는 신이나 혹은 시간을 주축으로 해서 인간의 역사를 고찰해왔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는 눈에 잡히는 인간의 생활양식이나 혹은 눈앞에 펼쳐진 공간세계를 주축으로 해서 그것을 고찰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인간에게서의 예술적 충동을 불러일으켜온 죽음에 대한 의식은 그 역할을 제대로 더 이상 행해가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그 이유는 이렇게 설명될 수 있다. 인간은 보이지 않는 신이나 시간을 축으로 해서 인간자신들의 일생이나 그것들로 엮여지는 인류의 역사를 파악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보이지 않는 신이나 시간을 통해 인간들이 자신들의 존재를 더 이상 파악하지 않게 됨에 따라서, 인간들은 자신들의 출생이나 죽음이 신이나 시간의 산물로 더 이상 인식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제 인간들은 자신들의 탄생이나 죽음을 자신들의 눈앞에 펼쳐진 공간적 산물로 파악하게 된 것이다.
‘나는 하나의 시이다.’ 그렇다면 남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생각은 내가 내 앞에 무한히 펼쳐져 있는 공간을 주축으로 해서 나와 세계를 인식할 때만이 가능하다. 나는 시간이 아닌 공간세계를 주축으로 해서 사물들을 인식해간다는 생각에 착실해 봄으로써 글로 시를 쓰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생활 자세를 가져보려 한다.
자신이 서 있는 땅이 무한과 영원히 호흡해 가는 존재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현재 우리는 이 형이상학의 땅위에 존재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우리가 이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만은 남들이 무어라 해도 내 마음은 편안하고 내 삶은 신비롭다. 그래서 요즘은 우선 순간순간 주어지는 것들에 최대한 착실해 보고 싶은 생각뿐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에 대한 자신의 불완전한 신념이 몰고 오는 불안감 또한 없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사물과 내 속으로 더 깊게 들어가 보고 싶은 심정뿐이다.
좀 더 깊게 생각해보면, 더 들어가고 더 파헤쳐 들어가다 보면 몸으로 쓰는 시와 글로 쓰는 시가 합일에 이르는 그런 경지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는 아마 시란 글로 쓴 것이라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요즘은 이 형이상학의 땅위에 몸으로 쓰는 시가 진짜 시라는 생각에 착실해 보고 싶은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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