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자를 위한 기도
책소개
사랑과 죽음, 가장 원초적인 인생에 대한 물음
이제 막 사랑에 눈을 뜬 젊은 남녀와 죽음에 다가선 노인들의 삶을 서로 교차시키면서, 인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화두인 ‘사랑’과 ‘죽음’의 문제를 간결한 문체로 표현하였다.
아직 누군가를 진실하게 사랑해본 적이 없는 20대 후반의 젊은 청년인 주인공. 더구나 의료기회사의 영업사원이면서도 타인의 질병이나 죽음에 대해서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 그를 통해 메말라 가는 현대인의 사랑과 죽음에 대한 의식을 살펴보고자 한 순수 장편소설.
의료기회사의 영업사원인 주인공은 바쁜 일상에 묻혀 삶의 의미 따위는 생각할 겨를이 없다. 그러던 중 괴팍한 성격의 노인이 주인공의 회사에서 만든 휠체어에 문제가 있다며 수시로 홈페이지에 항의성 글을 올린다. 어느 날 주인공은 상사로부터 노인을 만나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오라는 지시를 받는다. 그리하여 바닷가 근처의 마을로 간 그는 우여곡절 끝에 한 여자의 도움(나중에 노인의 손녀로 밝혀짐)으로 노인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와의 대화를 통해 노인이 부당한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 후 주인공은 동료 직원 대신 그 마을에 위치한 지사로 발령을 받게 되고 이따금 노인을 만나 그의 진정한 인간성을 이해하게 된다. 아울러 노인의 손녀를 마음에 두게 되지만 다가설 용기를 갖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주인공은 노인을 통해 삶과 죽음, 진정한 사랑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운다. 몇 달 후 주인공은 몸에 이상 증세를 느껴 진단받은 결과 베체트병으로 판명된다.
베체트병이란 표면적으로는 그리 위험한 병은 아니지만 방치했을 경우 실명 내지 죽음에까지 이를 수 있는 질환이다. 자신이 병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되어서야 주인공은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 그동안 타인의 죽음을 피상적으로 바라보았던 그는 드디어 깊이 있게 죽음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주인공이 치료에 임하는 동안, 노인은 지병으로 숨을 거두게 되고 주인공은 그를 회상하며 여자와 진지하게 사랑하겠다고 결심한다.
저자 소개
전광섭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계간지 ‘자유문학’에 중편 ‘항구’와 ‘진정한 용기’로 등단하였다. 현재 경기도 안양시 양명여고 교사로 재직중이고 현재 한국소설가협회 회원이다.
출간 도서로는 우화소설집 ‘사라나무 숲 이야기’, 장편 소설 ‘자새미 마을의 역’, 장편소설 ‘크림케이크’ 가 있다
본문 중에서
그는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물끄러미 나무를 쳐다보고 있더니 두툼한 손바닥으로 줄기를 툭툭 치며 나를 응시했다.
“아는지 모르겠소만, 때죽나무는 생명을 빼앗는 나무라고 할 수 있지. 달리 표현하면, 소박한 꽃이나 그윽한 향기 속에 날카로운 비수를 감추고 있다고나 할까?”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등산 중에 얻어들은 바로는, 때죽나무야말로 여러 모로 쓸모가 많은 나무였다. 그런데 윤 노인은 지금껏 내가 지니고 있던 상식을 완전히 부정하는 듯한 발언을 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의를 제기할 상황은 아니었다. 까딱 잘못해서 그의 비위를 거슬렀다가는 성깔 사나운 노인이 어떻게 나올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피곤한 몸을 이끌고 해안 마을까지 와서 이제껏 이루어낸 모든 성과가 수포로 돌아갈지도 몰랐다. 내가 잠자코 있으려니 여자가 나를 돌아보며 보충 설명을 해 주었다.
“아직 잘 모르시는군요? 때죽나무 잎과 열매에는 독성이 있답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돌로 찧어서 강이나 개울에 풀어 놓아 물고기를 잡곤 했죠.”
처음 듣는 이야기라 나는 반신반의했다. 물고기를 죽이거나 기절시킬 만큼 독성이 강하다면 등산객들이 모를 리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독을 풀어 물고기를 잡을 만큼 강이나 시내가 풍요롭지 않기 때문에 아예 화제에 올리지 않았는지도 모르지만 나로서는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선 정말 비수와 같군요?”
“다소 비약적인지는 모르지만 모든 존재의 숙명이겠죠. 곰곰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은 게 없잖아요?”
26 ~27 페이지
나는 오랫동안 숨겨왔던 속마음을 털어놓고 말았다. 굳이 드러내고 싶진 않았지만 감정이 격앙되는 바람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녀는 굳어진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나를 직접 본다기보다는 배후에 있는 무한대의 공간을 응시하는 느낌이었다. 잠시 후,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가 쳐들며 떨리는 손으로 머리끈을 고쳐 맸다.
“그런 외적인 관계가 뭐 그리 중요하겠어요? 정말로 중요한 건 우리가 지금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 아닐까요?”
그녀는 다시 맞은편 건물을 향해 돌아섰다. 이번에는 헐벗은 가로수에 가려 간판의 일부만 보였다. 그건 당장이라도 떨어질 듯 위태롭게 보였지만 행인들 가운데 고개를 쳐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3층에서 뛰어내려 간판을 낚아채고 싶었으나 단지 마음뿐이었다.
나는 창턱에 손을 얹은 채 심호흡을 했다. 입김으로 유리창이 뿌예지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그러고는 무심코 낙서를 시작했는데,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같은 공간’이라는 글자만 무수히 반복하고 있었다. 내 낙서를 보고 그녀가 한 걸음 다가왔다.
“그래요. 우린 지금 같은 공간에 살고 있어요. 중요한 건 바로 그거예요.”
그녀가 같은 말을 반복했을 때 나는 단지 즉흥적으로 떠올린 게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생각을 단지 무덤덤하게 표현했을 뿐이다. 나는 그녀를 향해 내일쯤 시간을 내어 서울로 올라가 보겠다고 말했다.
232 ~233 페이지
나는 방파제에 부딪히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위로 둥근 달이 떠올라왔다. 달은 검푸른 수면 위를 서서히 움직이더니 바다 한가운데에 이르자 멈추었다. 곧이어 달빛 속에서 윤 노인의 우렁찬 음성이 들려왔다.
“여보게, 날 보러 왔는가?”
내가 깜짝 놀라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렇다면 내가 어디에 있는지 똑똑히 보게!”
나는 눈을 부릅뜨고 그의 음성이 들려오는 곳을 주시했다. 그러자 달빛을 타고 무엇인가 거대한 물체가 서서히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건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루어진 외양과는 달리 어마어마한 힘으로 바다를 가르더니 그 밑으로 쑥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그렇지만 불과 숨 한 번 들이쉬는 사이 흰 물기둥을 이루면서 허공으로 솟구쳐 올라왔다. 나는 거대한 물체의 정체를 몰라 입을 벌린 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온몸에 진동이 느껴졌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내가 넋을 잃고 바라보는 사이 물체는 다시 나를 향해 소리쳤다.
“여보게, 나야, 나! 바로 윤충식이란 말일세!”
그제야 나는 거대한 물체가 바로 윤 노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니, 주로 깊은 바다에서만 활동한다는 향유고래임을 깨달았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노인과 고래는 하나가 되어 달빛을 타고 유유히 노닐거나 대양을 휘젓고 다니곤 했던 것이다.
나는 황홀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보고 있는 동안 그는 깊고 은은한 목소리로 승리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마치 대왕오징어를 쫓아가 물어뜯고 승리에 도취되어 부르는 것 같았다. 마침내 노래를 마친 그는 처음 나타났을 때와는 반대로 거대한 몸을 이끌고 달을 향해 천천히 사라져갔다.
나는 손을 흔들며 그를 부르다가 문득 눈을 떴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가슴이 몹시 뛰는 바람에 한동안 숨을 고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참 후, 가슴이 진정되자 나는 윤 노인을 향해 속삭였다.
“비록 오랜 시간은 아니었지만 당신과 함께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또한 당신을 통해 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서 감사드립니다. 어디에 계시든 지금과 같은 모습을 고이 간직하십시오.”
그런 말을 하고 나자 나는 어느 정도 죽음을 이해할 수 있을 듯했다. 죽음은 결코 현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아니었다. 그건 나의 내부에서 움트고 자라나 가까운 친구처럼 언제나 내 안에 머물러 있었다. 다만 내가 지금껏 거부하고 두려워했을 뿐이다.
그런 깨달음에 이르자 마음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 뜨거운 것이 솟구쳐 올라왔다. 그건 마치 깊은 해저에서 울려오는 향유고래의 노래처럼 온통 나를 휘감았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그 열기와 힘에 의해 숨이라도 막힐 것 같았다. 나는 눈을 감은 채 누구에게랄 것 없이 마음을 다해 소리쳤다. 거친 파도에서 잔잔한 해저를 볼 수 있게 해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 외침은 처음으로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였다.
279 ~281 페이지
출판사 리뷰
인간이 자의식을 갖게 된 이후 가장 오랫동안 품은 의문이 있다면 탄생과 죽음에 관한 것이리라. 우리의 육체는 분명 부모에게서 생겨나고 결국엔 무형의 상태로 환원되어 버리지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정신은 과연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것조차 완전한 무(無)로 환원되는 것일까? 아니면, 비록 형태는 변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존재하는 것일까? 우리는 늘 가까운 곳에서 다양한 탄생과 죽음을 목격하면서도 그러한 의문을 해결하지 못해 왔다.
오랜 세월 수많은 철학자와 사상가와 종교가들이 파고들었지만 여태 한 걸음도 다가서지 못한 느낌이 든다. 그건 어쩌면 탄생과 죽음 자체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 영역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달리 표현하면, 작은 물방울이 넓은 바다를 알 수 없듯이 부분에 불과한 인간이 전체인 우주를 이해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 글에는 어린아이부터 청년, 중년, 노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들 대부분은 죽음을 통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경험을 갖고 있다. 그런 구성을 택한 이유는 죽음이란 어느 누구에게나 다가올 수 있다는 평범한 사실을 일깨워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또한 죽음을 겪는 과정은 고통스럽지만 그런 경험은 결국 우리의 영혼을 성숙케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죽음에 대한 사색은 얼핏 부정적으로 작용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없지 않았지만, 어느 누구도 회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가까이 다가섬으로써 얻게 되는 것도 많으리라. 우리는 죽음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순간부터 가슴 속에 이미 그 씨앗을 잉태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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