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됭 전투
“인류는 미쳤다! 이런 짓을 하는 걸 보면 미친 게 틀림없다.
이 학살극을 보라! 이 공포와 주검을 보라! ……
지옥도 이 정도로 끔찍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은 모두 미쳤다!”
_ 1916년 6월 베르됭에서 전사한 알프레드 주베르의 마지막 일기에서
10개월 동안 70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고
제1차 세계대전의 향방을 가른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투 303일의 기록
베르됭 전투는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투였다. 1916년 2월부터 12월까지 10개월 동안 독일군과 프랑스군 사이에서 벌어진 이 전투에서 최소 70만 명의 사망자가 났다. 독일군이 먼저 시작한 전투의 목표는 프랑스군을 ‘말려 죽이는’ 것. 프랑스군의 병력과 물자를 엄청나게 소모시킨 후 서부전선을 돌파해 전쟁을 끝내는 것이었다. 결전의 장소로 프랑스 북동부의 요새 도시 베르됭이 선택되었다. 대포를 비롯한 물자와 병력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했던 독일의 승리가 예상되었다. 그러나 10개월 뒤 독일군은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베르됭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의 흐름도 바뀌었다. 베르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베르됭 전투는 ‘참호전’의 전형이었다. 기관총과 대포 공격을 피하기 위해 병사들은 깊숙이 참호를 파고 들어갔고 물이 무릎까지 차오르는 진지에서 얼음물을 퍼내며 적진으로 진격하는 순간만을 기다렸다. 극심한 허기와 갈증, 잠든 얼굴 위로 뛰어다니는 쥐와 벼룩, 이가 병사들을 괴롭혔다. 병사들은 말했다. “이곳은 지옥이다.”
베르됭 전투에서는 인간이 대포와 싸웠다. 돌파를 위해 달려 나간 보병들은 적군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쏟아지는 포탄에 무참히 쓰러졌다. 때로 아군 포대에서 쏜 포탄에 맞아 죽기도 했다. 급조된 참호 벽에 죽은 동료의 머리와 팔다리가 박혀 있었고, 포탄 구덩이에는 시체들이 떠다녔다.
베르됭 전투는 지휘관의 냉혹함이 만들어낸 참사였다. 양측 지휘관 모두 병사들의 고통에 무감각했다. 독일군 참모총장 팔켄하인의 전략은 ‘말려 죽이기’였고, 프랑스군 총사령관 조프르의 신조는 ‘죽을 때까지 공격하기’였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물러나지 않고 적진을 돌파하는 것이 전략의 전부였다. 한 뼘의 땅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명령이 병사들을 지배했다. 결국 독일군과 프랑스군 모두 무수한 죽음을 양산했고 베르됭은 무너진 건물의 잔해, 박살난 무기, 희게 변한 유골이 쌓인 ‘쓰레기 더미’가 되었다.
베르됭 전투의 실상을 총체적으로 밝힌 전쟁사의 고전
《베르됭 전투》는 소모전의 전형인 베르됭 전투를 통해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사건 전체를 살펴보는 통찰력 있는 역사서다. “베르됭 전투를 다룬 책 중 가장 중요한 책”, “걸작”으로 평가받는 이 책에서 저자 앨리스터 혼은 병사들이 남긴 일기와 편지, 지휘관들의 회고록, 신문과 잡지 기사, 독일과 프랑스의 공식 사료 등 관련 문헌은 물론이고 생존한 참전 군인들에게 직접 들은 증언까지, 다방면의 수많은 자료를 바탕 삼아 1916년의 베르됭을 그대로 되살려냈다.
저자는 무감각해질 정도로 만연한 죽음과 부상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싸운 병사들의 굳은 의지, 야전 지휘관들의 용기와 희생정신, 일기 변화, 병사들을 지옥으로 몰아넣은 양국 군 지도부의 무능과 내부 갈등까지 전투의 성패를 가른 모든 요인들을 명료하게 정리해 보여준다. 그리하여 베르됭 전투에서 독일이 뚜렷이 우세했는데도 왜 패배할 수밖에 없었는지, 프랑스는 ‘인계에 펼쳐진 지옥’이라는 10개월의 전투 속에서 어떻게 베르됭을 지킬 수 있었는지, 그리고 왜 이 전투가 제1차 세계대전의 흐름을 바꾼 전투라 불리는지, 나아가 제2차 세계대전에까지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는지를 설득력 있게 알려준다.
1916년, 베르됭에서 벌어진 최악의 전투
1915년 말, 독일군 참모총장 에리히 폰 팔켄하인은 제1차 세계대전의 교착 상태를 풀고 승기를 잡기 위해 프랑스를 점령하기로 결심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는 베르됭을 공격 지점으로 삼자고 제안하며 이렇게 말했다. “프랑스군은, 자발적으로 후퇴하는 일은 없을 것이므로, 피를 남김없이 흘리고 죽게 될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프랑스와 독일은 여러 차례 베르됭에서 치열하게 맞붙었는데, 특히 1870년의 프랑스-프로이센전쟁에서 마지막까지 버티다 독일에 함락된 베르됭은 프랑스의 자부심의 상징이었다.
프랑스를 ‘심판’하라
1916년 2월 21일, 독일군은 ‘심판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첫 공격을 개시했다. 독일군은 포격으로 기세등등하게 선공했다. 몇 시간 동안 폭우처럼 쏟아진 포탄 세례에 프랑스군의 철로는 모두 망가졌고 숲은 거대한 화염 덩어리가 되었다. 독일군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돌격부대를 보냈다. 전장을 지키던 프랑스군 병사들은 상부의 지휘도 없고 지원도 받지 못한 채로 밀려드는 독일군을 대적해야 했다.
프랑스군 제165연대가 곧바로 심각한 상황에 빠졌다. 포격에 참호 여럿이 완전히 사라졌고 소총의 총열은 먼지로 가득 차 쓸 수 없게 되었으며 수류탄과 탄창이 담긴 상자들은 잔해에 파묻혔다. 폭이 거의 800미터나 되는 전선의 한 구역에서 2개 소대가 전우들을 파내느라 녹초가 되었다. 이들이 독일군의 첫 번째 정찰대를 발견했을 때, 그 독일군 병사들은 겨우 약 9미터 밖에 있었다. …… 진지 두 곳은 거의 아무런 저항도 없이 점령되었고, 부아도몽 숲의 제1선 참호 전체가 곧 무너졌다. 동행한 독일군 기관총 분대들은 부리나케 움직여 노획한 무기를 차지했고, 산소 아세틸렌 토치를 든 병사들은 프랑스군의 남은 가시철조망을 잘랐다. …… 지휘관 들라플라스 대위는 정신이 나가 여단장 볼레 대령에게 이런 통신문을 보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 6장 첫날(141쪽)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소모전
소모전은 승리를 이끌어내기 위해 적군의 전투력을 소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그러나 이는 자칫하면 인명으로 인명을 소모해 양측 모두 큰 손실을 입는 위험을 초래하기도 한다. 베르됭 전투는 소모전의 전형이었다. 연합군은 ‘총알받이’가 될 병사의 수를 따져볼 때 연합군이 우세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양쪽이 한 사람씩 병력을 잃는 방법을 쓰면 결국 독일군을 물리칠 수 있다고 기계적으로 계산했다. 동맹군도 같은 전략으로 맞대응했다. 어느 독일 작가는 “마지막에 남은 독일군과 프랑스군 병사가 주머니칼이나 이빨, 손톱으로 서로 죽이려고 목발을 짚고 절뚝거리며 참호 밖으로 나올 때까지” 전투가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베르됭 전투는 역사상 단위 면적당 사망자 수가 가장 높은 전투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얻었다.
베르됭 전투의 전체 사상자 수는 다양하게 추산되었다. 그 전쟁에서 인간의 생명은 결코 꼼꼼하게 집계되지 않았다. 프랑스의 공식 전쟁사(1936년 출간)는 1916년 10개월 동안 베르됭에서 입은 손실을 37만 7,231명으로 잡는데 그중 16만 2,308명이 전사나 행방 불명이다. 반면 처칠의 《세계 위기(World Crisis)》(1929)를 바탕으로 한 계산은 46만 9천 명까지 높게 잡는다. 같은 기간 동안 독일군이 입은 손실은 가장 신뢰할 만한 수치에 따르면 대략 33만 7천 명이며(처칠은 37만 3천 명에 가깝다고 계산했다), 당대 독일군 명부에 따르면 사망과 행방 불명만 10만 명이 넘는다. 어떤 수치를 받아들이든 프랑스와 독일 양측 사상자를 합치면 70만 명이 넘는 어마어마한 수가 된다. …… 유해는 오늘날까지도 계속 발견되고 있다. - 28장 결말 없는 전쟁, 승자 없는 전투(519~520쪽)
참호, 병사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곳
1916년 2월 혹독한 겨울, 전투를 기다리며 병사들은 극심한 공포에 시달렸다. 정신적 공포에 더해 참호의 열악한 환경이 병사들을 한 번 더 괴롭혔다. 참호는 지옥이었다. 병사들은 물이 차고 빠지기를 반복하며 끈적끈적한 진창이 된 참호에서 질병에 시달렸고 모래 같은 비스킷을 먹으며 쥐떼와 공생했다.
참호는 보통 10여 센티미터, 때로는 30센티미터 높이로 물이 차올랐고, 결코 완전히 마르는 법이 없었다. 병사들은 악취 나는 진흙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었고, 근무 교대 후 짧은 시간 동안만 이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대피호는 거대한 쥐들과 나누어 썼다. 참호의 쥐들은 …… 전쟁 덕분에 번성한 유일한 생명체로 보였다. 쥐는 잠든 병사들의 얼굴 위로 뛰어다녔고, 배낭 속 음식을 갉아먹었으며, 아직 매장되지 않은 사망자의 살로 포식했다. 그러나 이 마지막을 제외하면 두 종의 생활은 거의 구분할 수 없었다. - 5장, 참호 속의 병사들(117~118쪽)
베르됭의 좁은 전장에서 병사들 앞에 놓인 선택지는 참호를 파거나 포격에 죽는 것, 두 가지뿐이었다. 적군이 방어선 뒤에서 끊임없이 쏘아대는 포탄은 진격을 저지할 뿐 아니라 병사들의 피난처도 완전히 뭉개버렸다. 독일과 프랑스가 같은 방식으로 전투를 이어 가면서 베르됭에는 교착 상태가 계속됐다.
독일군이 진격해 점령한 것은 대부분 여기저기 널린 포탄 구덩이였다. 구덩이 안을 보면 고립된 병사들이 수류탄과 곡괭이 자루로 자신들의 ‘진지’를 지키며 살아 있거나, 잠들어 있거나, 죽어 있었다. 이번에는 독일군의 상황도 별로 나을 것이 없었다. 프랑스군 대포가 쉴 틈을 주었더라도, 독일군이 소중히 여긴 지하 진지를 만들 물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숲의 대포들이 친 치명적인 탄막 때문에 독일군의 힘이 소진되면, 그 뒤엔 반드시 프랑스군의 반격이 이어져(24시간 이내에 반격했다) 생존자들을 다시 밀어냈다. - 14장 불타오르는 지옥, 모르옴(270쪽)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요새가 점령되다
저자는 실제 작전에 참여했던 병사가 “실제 참전한 이만 알 수 있는 이야기”라고 평가할 정도로 눈으로 직접 보듯이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전투 현장을 묘사한다. 특히 베르됭 방어의 주춧돌이자 난공불락으로 평가받던 두오몽 요새에 소수의 독일군이 잠입해 총성 한 발 없이 점령하는 과정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쿤체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칠흑같이 어두운 긴 터널을 따라 발걸음을 내디뎠다. 바깥에서 귀를 찢을 듯한 포격 소리가 들린 후 숨 막힐 듯 섬뜩한 고요가 이어졌다. 쿤체는 계속 전진했다. …… 쿤체는 곧 방출된 탄피가 내는 덜커덕 소리를 들을 만큼 접근했다. 이 대담무쌍한 중사는 권총을 손에 쥔 채 문을 박차고 들어가 독일어로 고함을 질렀다. “손 들어!” 화약으로 얼굴이 검게 그은 프랑스군 포병 네 명이 크게 놀라 멈춰 섰다. 그들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포탑 밖으로 거칠게 떠밀렸다. 쿤체는 한 손으로 그 요새에서 가장 큰 대포인 155밀리미터 포의 발포를 멈추었다. - 9장 난공불락 두오몽 요새 점령(191쪽)
2월에 일어난 두오몽 요새 점령 못지않게 6월의 보 요새 점령도 상세하게 다룬다.
레날은 신호기로 다시 전갈을 보내 호소했다. “완전히 지치기 전에 개입하라. …… 프랑스 만세!” 그렇지만 수빌로부터 추가 응답은 없었다. 보 요새가 굴복했으리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그날 늦게 거대한 포탄 한 발이 요새에 떨어져 중앙 통로의 둥근 천장 일부가 함몰되었고, 질식과 갈증에 대한 우려에 생매장될지 모른다는 걱정이 더해졌다. …… 6월의 지난 사흘 동안 수비대 병사는 각자 전부 합해서 반 잔의 더러운 물을 받았다. 절망에 빠진 병사들은 요새 벽면의 습기와 점액을 핥았다. …… 일부 병사들은 통로에 기절해 있었고 다른 이들은 자신의 오줌을 마시고 심하게 토악질을 해댔다. - 21장 보 요새의 마지막 일주일(421쪽)
화염방사기에서 독가스까지, 대량살상무기의 등장
베르됭은 신무기의 시험장이었다. 독일군은 거대 대포, 화염방사기, 포스겐 가스 등으로 무장하고 프랑스군을 압박했다. 독일군 화염방사기는 숨어 있던 프랑스군 병사들을 순식간에 쓰러뜨렸다. 독일군이 쏘아올린 포스겐 가스탄은 프랑스군의 숨통을 틀어막았다. 독일군은 쓰러지는 적군 병사들 위로 곧바로 포탄을 쏟아부었다.
왼편에 뚫린 틈으로 조금씩 새어 들어온 회녹색 물결이 젊은 사관후보생 베르통의 소대가 지키는, 거의 온전하고 잘 방비된 진지에 도달했다. 독일군은 잠시 멈춰 의논했다. 그리고 베르통의 병사들이 사격을 가할 유효 표적을 찾기 전에 먼저 맹렬한 불기둥이 그들을 덮쳤다. …… 곧 화염방사기가 욋가지를 엮어 만든 참호의 외벽에도 불을 질렀다. 방어군은 의복과 머리카락에 불이 붙은 채 고통 속에 울부짖으며 어지럽게 도망쳤다. 독일군은 연기를 내뿜는 진지를 신속히 점령한 뒤 기관총을 설치해 공포에 사로잡힌 프랑스군의 등에 총탄을 퍼부었다. - 6장 첫날(145~146쪽)
500문이 넘는 독일군 중포가 겨우 약 1.6킬로미터가 약간 넘는 전선을 따라 포격을 시작했다. …… 지상의 병사들은 “살아 있는 것은 다 죽여 없애려는 듯 독일군은 우리 한 사람마다 대포 한 문씩 지정한 것 같다”고 느꼈다. …… 어느 장교는 자신이 어느 하루 동안 참호에서 어떻게 세 번이나 파묻혔는지, 또 그때마다 병사들이 어떻게 자신을 꺼내주었는지 묘사했다. …… 어느 대대에서는 겨우 세 명만 살아남았다. 나머지는 대부분 포격 때문에 산 채로 땅에 파묻혔다. - 14장 불타오르는 지옥, 모르옴(283~284쪽)
포스겐?독일군은 그 가스탄에 그려진 문양을 따라 ‘녹십자 가스’라고 불렀다.?이라는 이름이 붙은 가스는 전쟁에서 사용된 가장 치명적인 가스에 속한다. …… ‘녹십자 가스’는 살아 있는 모든 것을 공격했다. 나뭇잎은 시들었고 달팽이까지 죽었다. 한 가지 좋은 일이라면, 시체로 넘치는 전장 위를 날아다니는 파리 떼가 일시적으로 사라진 것이었다. 수빌까지 이어지는 길을 따라 말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섬뜩하게 뒤틀린 채 쓰러졌다.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혼돈이었다. - 24장 독가스 공격과 죽음의 카니발(456~457쪽)
“이곳은 지옥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병사들의 목숨은 죽음으로 상대의 전력에 손실을 입힐 때만 의미가 있었다. 상급 지휘관들과는 자주 연락이 끊겼고, 병사들은 맞닥뜨리는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대응하며 목숨을 지켜야 했다. 병사들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인내하며 전투를 이어 갔다. 전투력이 없는 부상병들은 치료조차 받지 못한 채 그대로 방치되었다.
과로한 군의관들은 즉시 부상자를 세 부류로 나누었다. 어쨌든 죽을 것이므로 수술할 가치가 없는 사람들. 십중팔구 살아나겠지만 전쟁 수행에 더는 쓸모가 없을 사람들. 그리고 언젠가는 다시 군무에 복귀할 수 있을 사람들. 의사들은 세 번째 범주에 속하는 부상자들에게 아낌없이 관심을 쏟았는데, 이를 ‘유효 병력의 보존’이라고 했다. 두 번째 범주는 시간이 허락하면 대충 봉합해놓았다. 그 결과는 종종 끔찍했는데, 뒤아멜은 이렇게 소름끼치는 문장으로 묘사했다. “산드라프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옆구리에 뚫린 구멍으로 변을 보았다.” - 5장 참호 속의 병사들(125쪽)
멀리서 호각 소리가 들리면, 엄청나게 강력한 폭발 진동을 견디기 위해 온몸을 움츠린다. 그 일이 되풀이될 때마다 새로운 공격, 새로운 피로, 새로운 고통이 찾아온다. …… 피가 머리끝까지 솟구치고 열기에 몸이 타버릴 것만 같고 진이 빠져 대처할 수 없게 된다. …… 마침내 우리는 단념하고 상황에 몸을 맡긴다. 파편을 막으려고 배낭으로 몸을 엄폐할 힘조차 없다. 신에게 기도할 힘도 남아 있지 않다. …… 총탄에 맞아 죽는 것은 별일 아니다. 몸의 나머지 부분은 멀쩡하지 않은가. 그러나 사지가 잘리고 찢어져 과육처럼 으깨지는 것, 그것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공포다. 그것이 기본적으로 포격이 주는 고통이다. - 15장 포탄 구덩이와 시체들의 땅(294쪽)
왜 독일군이 패배했나?
베르됭은 제1차 세계대전의 흐름을 바꾼 전투였다. 전투 초기, 독일군은 병력과 무기에서의 우세, 치밀한 전략을 바탕으로 선공해 승기를 잡았다. 독일군은 당시 난공불락으로 평가받던 프랑스의 두오몽 요새 등을 점령했지만 길어지는 전투로 인한 인적?물적 자원 부족, 지도부 간의 갈등으로 병력이 약화되었다. 1916년 말, 독일군이 10개월간 33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면서 얻은 것은 런던의 왕립 공원을 합친 것보다 약간 더 큰 땅이 전부였다. 반대로 프랑스는 10개월의 전투를 끈질기게 버티면서 끊임없이 병력을 충원하고 무기를 보강하고 훈련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솜강 전투를 발판 삼아 흐름을 반전시켰다. 팔켄하인의 ‘말려 죽이기’ 실험은 실패로 돌아갔다. 베르됭 전투로 인해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패배는 분명해졌다.
황태자는 이렇게 인정했다. “뫼즈강의 맷돌은 군대의 육신은 물론 정신까지 완전히 갈아버렸다.” 지휘관들에 대한 군대의 신뢰가 처음으로 근본적으로 흔들렸으며 사기는 결코 회복되지 않았다. 전선에서나 후방에서나 전쟁 피로증이 나타났으며, 베르됭 전투가 끝난 직후 독일의 첫 번째 강화 제안이 등장했다는 사실은 암시하는 바가 컸다. 1917년 독일은 한동안 팔켄하인의 프랑스군 ‘말려 죽이기’ 전략을 이용할 힘이 없었다. - 28장 결말 없는 전쟁, 승자 없는 전투(525쪽)
저자 앨리스터 혼은 베르됭 전투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베르됭 전투의 끔찍한 점 가운데 하나는 발발 후 첫 세 달이 지나면서 어찌된 일인지 전투가 인간의 지휘에서 벗어나 스스로 움직이는 듯했다는 것이다.” 프랑스와 독일 모두에 베르됭은 영광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이 상징에 사로잡혀 두 나라 모두 전술적으로 후퇴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독일이 최종적으로 베르됭에서 몸을 빼기는 했으나 결과적으로 독일과 프랑스 두 나라의 손실은 거의 비슷했으며, 전투 시작과 비교해 전선의 이동도 거의 없었다. 베르됭은 프랑스에는 신성한 상징이 되었으나 내적으로 군대의 정신은 체념에 물들었으며, 1940년 독일군은 끔찍한 패배를 극복하겠다며 다시 한번 베르됭으로 전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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