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소개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 1762-1835)
다산 정약용 선생은 1762년, 진주 목사를 지낸 아버지 정재원과 해남 윤씨인 어머니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5세에 풍산 홍씨와 혼인하였으며, 16세 때에는 성호 이익의 저서를 통하여 실학에 접하였다.
1783년 22세 때,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경의진사가 되어 성균관에서 수학하게 되는데, 이때 정조에게 중용 강해를 지어 바쳐서 눈에 띄게 되었다. 28세 때에 문과에 급제한 후 경기도 암행어사, 동부승지, 병조참의, 우부승지, 형조참의 등의 벼슬을 지냈다.
다산은 천주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반대파의 공격에 시달렸는데, 1801년,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즉위하자마자 반대파에 의해 박해를 받았다. 천주교 탄압 사건인 신유박해로 인해, 정약전은 흑산도로, 다산은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이때가 다산의 나이 40세 때이다.
강진에 유배된 다산은 동문 밖 주막을 사의재(四宜齋 네 가지를 마땅히 해야 할 방)라 이름 짓고 유배생활을 시작하였으며 혜장선사와의 인연으로 강진읍 보은 산자락 암자인 보은산방(寶恩山房)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강진읍 목리 제자 이학래의 집에서 생활하기도 하였다. 1808년 강진만이 내려다보이는 만덕산 기슭에 초가로 지은 ‘다산초당(茶山草堂 ; 사적 제107호)’으로 이사하면서 해배될 때까지 방대한 학문적 유산을 남기었다.
다산은 18년 간 강진에서 생활하면서 백성들이 사는 현장을 직접 둘러보고, 그들과 대화하면서 보고 느낀 바를 왕성한 저술활동으로 승화시켰다. 특히 (목민심서(牧民心書))는 가난하고 핍박받는 백성들의 고통을 생생하게 목격하고 목민관의 의무를 절실하게 깨닫게 되면서 탄생한 불후의 명저이다.
다산 초당에 머무는 동안 강론 및 학문 탐구 활동을 통하여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 600여 권의 저서를 저술함으로써 조선 실학 사상을 집대성하였다.
57세 때인 1818년 가을,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인 경기도 남양주로 돌아간 다산은 이후에도 저술 활동을 계속하면서, 그 동안의 학문적 성과를 모아 『여유당전서』를 남겼다.
1836년,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생가인 여유당 뒷산에 묻혔으며, 1910년(순종 4년)에 ‘문도(文度)’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훗날의 어떤 성인도 자신의 학문을 질책할 수 없으리라고 자부하던, 다재다능한 천재 실학자 다산의 사상과 철학은 오늘날까지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