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 없는 사진가
이용순 고품격 사진 작품 24점 수록!
고통을 사진 찍듯 써 내려간 글,
삶의 고독과 슬픔을 아름답게 보여주는 책!
폐쇄된 공간에서 사진예술가가 선택한 것,
카메라와 양각대 대신 종이와 펜을 들고 사진을 쓰다!
예술가에게 획일적 질서의 강요는 치명적이다. 통제와 감시 속의 예술가는 뭍에 오른 물고기나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저자에게 견디기 힘든 건 그런 완고한 통제 시스템이 아니라 창작 도구(카메라)의 상실이었다. 자, 이제 어찌할 것인가. 머릿속에 들끓은 이미지들의 아우성을 어떻게 끄집어내 형상화할 것인가. 저자는 주저 없이 펜을 들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씹어 무언가를 창조해내야 하는 것이 예술가의 숙명인 것이다.
\'나는 사진가다. 표현의 욕구가 강한, 카메라가 없는 사진가다. 어떻게 이 눈에 보이는 생소한 그러나 충만하게 내 가슴을 적셔오는 이 오브제를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 - 요즘의 나는 종종 시를 쓴다. 나는 결단코 나의 시가 언젠가는, 누구에게는 사진으로 환원되어 보이기를 바란다. 나는 사진가이기 때문이다.\' - 〈시는 사진이다〉에서
저자는 그렇게 글을 쓰기 시작했다. 조리개로 들어오는 광원을 계산하며 셔터를 누르는 대신, 용수철 없는 재소자용 플라스틱 펜에 마음의 빛을 비추며 써 내려간 것들이었다. 계절이 열 번쯤 바뀌고 그가 일상에 복귀할 때, 그의 손에는 이 책의 초고가 될 열일곱 권의 노트가 들려있었다.
이곳에 담긴 글에는 역시나 ‘사진가다움’이 선명히 드러난다. 사진이란 시간과 공간이 교차하는 한 지점을 포착하여 물성을 부여하는 것. 그래서 사진을 흔히 기록의 동의어처럼 취급하기도 하지만, 대개의 사진은 그곳에 콘텍스트가 부여된 기억(memory)에 가깝다. 그래서 어떤 사진은 역사를 담고, 어떤 사진은 인물의 개성을 담고, 어떤 사진은 정치를, 어떤 사진은 철학이나 과학을 담고, 어떤 사진은 거짓말도 하는 것이리라. 저자는 그렇게 포착한 사물, 인물, 사건을 감방이라는 암실에서 종이와 펜으로 인화한다. 교도소 운동장의 맨드라미, 창살 바깥 산과 구름들, 동료 재소자들의 얼굴, 죄수들끼리 몰래 만든 요리의 메뉴들, 사동 안에서 소문으로 떠도는 사건들까지.
특히 저자가 즐겨 다루는 방식은 시(poem)다. 마치 오브제를 놓고 장면을 구성하듯, 때로는 연작사진을 이어 사건을 구성하듯 기억을 사로잡는다.
\'사진은 근본적으로 시간과 공간에 대한 형태다. 언제(when), 어디서(where)의 기록이며 이는 시간(time), 공간(space)으로 바꾸어 써도 문제가 없다. 그러므로 사진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기록이며 이는 시가 가지는 기본 형태와 일치한다.\' - 〈시는 사진이다〉에서
출소 후, 교도소의 노트에 등장하는 테마로 작가는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다. 이 책은 그 사진이 출품되는 전시회에 맞추어 출간되는 것인데, 해당 작품들은 책에도 대부분 수록되었다. 동일한 모티브가 글과 사진으로 어떻게 텍스트화되고 이미지화되는지를 비교하는 것도 독자의 흥미 요소 중 하나. 하지만 저자가 교도소에서 기억을 글로 남기기로 결심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삶’이다. 자신이 끌어안아야 할 삶이며 타인의 삶이기도 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다른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고 싶어진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이곳을 22번이나 온 사람은 어떤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인지, 또 누군가의 생명을 빼앗고 온 사람은 어떤 생각으로 사는 것인지-.\' - 〈책머리에〉에서
너무 익숙하고 당당하게 수감생활을 시작하는 살인범, 억울하다고 푸념만 늘어놓고 ‘고문관’ 노릇만 하는 목사님, 은박지와 건전지로 불을 붙이고, 수건과 옷에서 실을 뽑아서 십자가 기념품을 만드는 예술가들, 누가 벌금의 대납 대신 초코파이 15박스를 넣어준 노역수, 아무도 보지 않는 TV 화면 옆에서 각자의 일거리에 몰두하는 재소자들 모두에게 존재하는 것, 바로 삶이다. 진부함과 반전이 늘 공존하는,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삶. 그곳에는 당연히 온갖 비열함과 야비함 곁의 명예로움과 인간다움이 존재한다.
재소자들은 미국의 주가 몇 개인가 하는 따위의, 언뜻 사소한 사실을 놓고 수십만 원 내기를 건다. 심판은 교도관들이다. 미국 유학파인 저자는 내기에 자주 이겨 (교도소 기준으로) 엄청난 돈을 딴 적도 있다. 하지만 사실 누구도 돈을 건 적은 없었다.
\'그런데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도 나도 우리는 돈을 걸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그 값어치만큼의 자존심을 건 것이었다. 그 일이 있고 그와 나는 가끔 그 얘기를 하며 웃곤 했던 기억이 새롭다.\' - 〈담장 안의 지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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