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추린 전쟁사(중세편)
"유럽은 1792년 프랑스 혁명전쟁이 발발한 이래로 큰 혼란에 빠져 있었다. 1797년 전쟁이 발발한 지 5년이 지나, 프랑스 공화국은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을 격파했다. 제 2차 대프랑스동맹은 1798년에 채결되었으나, 1801년 이 역시도 패배하고 오직 영국만이 새로운 프랑스 원로원의 유일한 적으로 남아있을 뿐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아미엥조약(Treaty of Amiens)으로 적대관계를 끝내는데 동의하였다. 지난 10년간 처음으로 모든 유럽이 평화상태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양측에는 조약을 이행하는데 점점 어려움이 누적되는 등 많은 문제들이 지속되고 있었다. 영국정부는 1793년부터 이루어진 식민지 정복을 되돌려야 한다는데 분개했고, 나폴레옹은 영국군이 말타(Malta) 섬에서 철수하지 않는데 화가 났다. 긴장 상태는 나폴레옹이 아이티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원정군을 파견했을 때 더욱 악화되었다. 1803년 5월, 영국은 프랑스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다.
삼차동맹
1804년 12월 영국 스웨덴 협정은 삼차동맹의 창설을 이끌었다. 영국의 수상 윌리엄 피트(William Pitt)는 프랑스에 대항하는 새로운 동맹을 구성을 재 궤도에 오르도록 하기 위한 외교적 활동을 하면서 1804년과 1805년을 보냈다. 영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서로를 의심하던 마음은 프랑스의 몇 가지 정책적 실패에 의해 줄어들었고, 1805년 4월 영국과 러시아는 동맹에 합의하였다. 프랑스에게 최근 2번 패배한 기억 때문에 복수의 칼을 갈던 오스트리아 역시 몇 달 후에 동맹에 가입했다.
(중략)
동맹군이 진군하는 동안 쉘렌베르크와 도나우베르트의 방어 준비는 진지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대포가 장착되고 방어용 목책이 도시 주변에 건설되었으며 흉벽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참호가 밖에 파였다. 그러나 6월 2일 9시경 드 아코는 동맹군이 자신이 있는 위치로 진격해 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즉각적으로 그의 병사들에게 그의 엔지니어들이 준비하는 방어준비를 도울것을 명했다. 프랑스 장군이며 이 시대의 연대기 작가 장 마틴 데 라 콜로니(Jean Martin de la Colonie)는 후에 ""우리가 방어준비를 완벽히 하기에는 남겨진 시간이 너무 적었다.""라고 기술했다.
비록 동맹군의 진격이 진흙탕 길로 인해 느리긴 했지만 점심중간쯤 무렵에는 에벌모르겐(Ebermorgen)에 있는 보르니츠(W?rnitz)강을 건널 수 있었다. 말보로는 그의 병참당담 장성인 윌리엄 케도건(William Cadogan)에게 가능한한 빨리 도나우베르트의 근교로 갈 것을 명령했다. 그는 진영을 설치할 쉘렌베르크 근교를 탐색함으로써 동맹군이 여유 있는 공성전을 할 것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드 아코는 케도건의 준비를 보고 속아 그들에게는 방어를 끝내기 위한 하루의 시간이 남아 있다고 믿은 채로 아직도 끝나지 않은 방어준비에 대한 감시를 놔두고 도나우베르트의 두보르뎃(DuBordet)과 점심식사를 하러 가버렸다. 그러나 동맹군의 종대가 의도적으로 전방으로 진군했을 때 그들은 즉각적으로 강습을 시작했고, 특히 바바리아의 주둔기지에 공격을 집중했고 바바리아군은 도시의 외각 지역에서 반격 준비하고 비상을 알리는 알람소리를 냈다. 그의 안락한 식사를 거칠게 방해받은 드 아코 장군은 쉘렌베르그로 가서 그의 장병들로 하여금 무장한 채로 소집했다.
"
번호 | 별점 | 한줄평 | 작성자 | 작성일 | 추천수 |
---|---|---|---|---|---|
등록된 한줄평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