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중입니다만,
"마흔 한국 남자의 런던 육아 살림기"
-아내와 나는 전통의 성 역할에 순응하는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그것이 우리 부부의 가장 강한 관성이었다. 아내는 나에게 늘 “도와줄래요?” 했고, 나는 “도와줄게요.” 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안타깝게도 싫어하는 것, 할 수 없는 것, 나와 맞지 않는 것을 걸러내는 과정이다. 그것은 받아들이기보다 끊임없이 밀어낸 자리에 금을 그어 내가 부쳐 먹고 살 땅을 결정하는 안쓰러운 여정이다.
-아내의 머리카락은 지네보다 촘촘한 발로 집안 곳곳을 누비며 진공청소기의 길잡이가 되고, 청소기가 지나간 하얀 타일 바닥 위로 비내린 마당을 산책한 작은아이의 발자국이 찍힌다. 그 까맣고 선명한 발자국 위를 큰아이 축구공이 지나가는데 구정물 묻은 축구공은 끝내 다림질해 놓은 바깥양반의 하얀 셔츠를 가르고야 만다.
-가정에서의 현재 내 역할이 살림이지만, 수렵시대로부터 이어온 남성의 역할을 거부하는 것은 아직 많이 불편하다.
-어른들이 고무줄처럼 늘여놓은 시간 곳곳에 흩뜨리는 몸과 마음의 힘을 아이들은 지금 여기에 쏟고, 쏟아버린 그 자리에서 채운다.
-나는 분명 종일 분주한데, 놀고 있는 것 같았다. 흘려 보고 들었던 주부 우울증이 어떻게 찾아오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당장이라도 아이들을 집어삼킬 듯 화내고 있는 부모를 보면 왜 그럴까 싶었는데, 꼭 내가 그럴 것만 같았다.
-아이들은 아빠가 크고 강하기 때문에 혼내는 줄 안다. 아빠도 무섭고 불안해 그런 줄은 상상조차 못할게다. 아빠도 어찌할 바를 몰라 우선 너희들을 멈춰 세워놓을 수밖에 없음을 모를게다.
-아이들 눈앞 울타리를 걷어내야 할 무딘 칼을, 갈고 또 갈아 그 울타리 안에 아이들을 가두기 위해 겨눈다. 모두 다 해주지도 못할 거면서, 언제까지나 따라다니지도 못할 거면서.
-여러 해를 거친 내 미역국은 정작 우리 엄마가 끓여주던 미역국 맛을 닮아가는데, 우리 아빠와 엄마는 드셔보신 적이 없다. 괜스레 눈물이 난다.
-지금을 즐기지 못하는 아이들이 나중을 즐길 수 있을까? 어딘지도 모르는 나중을 위해 달리는 아이들이 막상 그 나중을 마주할 때 ‘오케이, 역시 엄마가 얘기한 그대로군.’ 할까?
-물론 내 머릿속 성공한 삶을 위한 전제는 아직은 좋은 대학이다. 아직 나에게는 그 먼 미래 또한 중요하다. 내 머릿속 세상의 경계 안에 아이들을 가두어 놓는 게 아직은 편하다.
-엄마 생각은 나는데 엄마에게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해선 생각이 없다. 아빠 생각은 나는데, 그 아빠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도무지 기억나지 않아 괜히 우울해지는 밤을 내 아이들은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꾸 주저하고 핑계를 댄다. 겁없이 늘 먼저 나서던 그 남자가 자꾸 겁 뒤에 숨는다. 늘 광장에 우뚝 선 동상 같아서 강한 줄만 알았던 그 남자가 자꾸 처진다. 그 남자에게도 나이가 흐른다는 걸 깨달은 건 얼마 되지 않았다.
-그 때의 엄마는 아들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어 질문도 많았다. 오늘의 엄마는 아들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아 질문도 하나다.
번호 | 별점 | 한줄평 | 작성자 | 작성일 | 추천수 |
---|---|---|---|---|---|
등록된 한줄평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