닳아지는 살들
1962년《사상계》7월호에 발표된 작품으로 작가에게 동인문학상을 안겨다 준 작품이기도 하다. 월남할 때 두고 온 맏딸을 매일 기다리는 아버지를 중심으로 실향민 가족의 아픔과 고뇌를 통하여 인간의 소외 의식과 분단의 고통이 얼마나 극복하기 어려운가를 말하고 있다.
“참, 언니도 그런 일 겪었수? 어릴 때 제삿날 저녁 말이요. 부엌엔 웅성웅성 아주머니들이 들끓구, 불을 많이 때서 온돌방은 덥구, 애들끼리 장난을 하다가 설핏 잠이 들지 않겠수? 얼마쯤 자다가 깨 보면 여전히 방은 덥구, 뜨락과 부엌과 마루에서는 사람들이 웅성거리구 방안엔 불이 훤하구, 그런데 아무도 없이 혼자 잠이 들어 있었거든요. 물론 입은 채로지요. 깨 보니까 마루에 부엌과 다른 방에서 웅성웅성 사람들이 들끓는데 제 방만은 아무도 없지 않겠수? 아득해서 혼자만 이렇게 있다는 것을 알려야 할 텐데 알려지지는 않구 답답해서 답답해서.”
“….”
“누구인가는 이렇게 투명한 밤일수록 엽기(獵奇·기괴한 일이나 물건에 호기심을 가지고 즐겨 찾아다님)적인 생각 있지 않수? 안나 카레리나를 자처해 본다든가 장 발장이 되어 본다든가 하면 괜찮다고 합디다만 어떨까, 그렇게라두 해 볼까 봐, 어마아 벌써 열한 시 사십오 분이유, 언니.” (중략)
순간 영희가 발작이나 일으킨 듯이 아버지 쪽으로 달려갔다. 한 손으로 식모를 가리키며, 한 손으로는 아버지를 부축해 일으켜 세우며 쪼개지는 듯한 큰소리로 말했다.
“아부지, 자 봐요. 언니가 왔어요, 언니가… 정말 열두 시가 되었으니까 언니가 왔어요. 이제 정말 우리 집 주인이 나타났군요. 됐지요? 아부지 자, 어때요? 됐지요? 아부지.”
식모가 이번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정말이에요, 아부지, 저렇게 언니가 왔어요. 그렇게도 기다리시던 언니가 왔어요.”
이렇게 소리를 지르면서도 식모를 내다보는 영희의 눈길은 적의(敵意·적대감)로 타오르고 있고, 아버지는 영희의 부축을 받으며, 저리 비키라는 것인지, 혹은 어서 들어오라는 것인지 분간이 안 가게 한 손을 들어 허공에다 대고 허우적거리고, 성식과 정애도 엉거주춤하게 의자에서 일어서 있었다.
꽝 당 꽝 당.
그 쇠붙이 소리는 밤 내 이어질 모양이었다.
-본문「닳아지는 살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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